사관이 왕의 동정과 주요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들은 내용과 논평까지 기록한 것을 '사초'라 했다.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왕조차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했고, 자료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만전을 기했다.
사초는 사관이 일차로 작성한 초초와 이를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중초, 실록에 최종 수록하는 정초의 세 단계를 거쳐 완성했다. 초초와
중초의 사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모두 없앴으며, 물에 씻은 종이는 재활용됐다. 이러한 작업을 세초라 했으며, 사초를 주로 세척하던 장소가
세검정 일대의 개천이었다. (169p)
'왕이라도 실록을 훔쳐볼 수 없다' 중에서 (월간중앙, 2013.9. 신병주)
요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있습니다. 박 화백이 10년 동안 20권으로 최근 완간했습니다. 원래는 아이에게 읽히려고 주었는데
저도 잘 보고 있지요. 경제노트 가족들께도 추천해드립니다.
박 화백이 완독했다는 조선왕조실록. 1대 태조에서 25대 철종까지 472년(1392~1863)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입니다. 1707권 1187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하지요. 하루 8시간씩 읽어도 4년이 걸린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의 기록문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유산입니다.
월간조선을 보니 신병주 교수가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쓴 글이 있더군요. 조선에서는 평소 8명의 사관이 당번을 정해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와
함께 궁중에서 숙직하면서 조회, 조참, 경연 등 왕이 참여하는 행사는 물론이고, 왕과 신하가 만나는 중요 회의에 꼭 참석해 그 내용을 사초로
남겼습니다. 사관들이 왕의 모든 것을 기록한 겁니다. 물론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왕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했습니다.
이후 왕이 사망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영의정 이하 주요 관리들이 편찬작업을 주관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주요 서적은 편찬이 완료되면
왕에게 바쳐졌지만 실록만은 예외였습니다. 편찬의 완성만 왕에게 보고했고, 춘추관에서 봉안 의식을 가진 후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했습니다.
왕이 보게 되면 실록 편찬의 임무를 담당한 사관의 독립성이 보장받지 못하고 역사의 실제가 왜곡될 수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록'은 중요합니다. 기록을 통해 '길'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에게는 '기록 문화'가 부족하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이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의 실천은 물론이고 그 기록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지키려는 제도적 장치도 엄중했습니다.
이런 수준의 나라가 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기록하는 국민에게는 '미래'가 있고, 그건 개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