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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나무 한 그루 - 신사 박인걸

HIIO 2025. 7. 15. 10:15

박달나무 한 그루 - 신사 박인걸

가파른 질멧재
무릎 연골이 시큰거리던 그 오르막에서
내 추억은 박달나무 그림자 아래 엎드려 있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면
숨이 가빠 관자놀이에 핏줄이 곤두서도
박달나무는 묵묵했다.
아무리 찔러도 피 한 방울 내지 않는 철벽
나무는 바람을 견디고 계절을 삼켰다.

도끼는 숨을 죽였고 톱은 이빨이 부러졌다.
그 단단함을 결코 자랑하지 않았으나
쇠로 두들겨도 부서지지 않는 무엇,
나는 그것을 의지라 배웠다.

대패로 다듬잇돌을 깎던 아버지 손에는
온종일 나무의 침묵이 묻어 있었다.
밤이면 나는 그 목침을 쓰다듬었고
꿈속에서 박달나무는 내 등뼈로 자라났다.

박달나무 향을 맡을 때마다
함부로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을 배웠고
쉽게 꺾이지 않으려 휘어지는 법도 익혔다.
박달나무는 베여도 말이 없었다.
이제 내 안에는
질멧재 박달나무보다 더 우람한
박달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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