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배나무 - 박인걸
내 소년 시절 안뜰에
늙은 돌배나무 한 그루
사계절이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붉은 진액을 빨아먹었다.
봄이면 흰 나비 떼 같은 꽃잎이
여름이면 수만 개 푸른 잎들이
가을이면 고드랫돌 같은 돌배가
나무 속살까지 갉아 먹고
겨울이면 돌배나무는 알몸이 된다.
비바람 휘몰아치던 밤에도
한겨울 흰 눈이 쌓이던 밤에도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
늠름한 자세로 햇살에 빛났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바람에 난타당한 가지는 주저앉고
추위에 찔린 가지는 말라가며
벌레에 갉힌 밑동은 패이고
계절을 잃어버린 나무는 스러졌다.
그토록 강인하던 의지도
서서히 시간에 깎여만 갔다.
내어 주기만 하고 채우지 못한 나무는
내 아버지처럼 그렇게 무너졌다.
그리고 봄이 와도 다시 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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