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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라싸 여행후기 -2 서안-진시황릉

HIIO 2018. 5. 7. 14:20

3시 15분 진시황을에 도착하여 들어가는데 매표소는 수표청(售:팔수票厅)이라고 써있고 보통표가 150위안, 대충 3만원쯤으로 박물관의 하루 평균 입장객 수입은 18억원이 된단다.

입구에 세계문화유산 표지가 선명한데 1987년에 등재되었고 공식명칭은 秦始皇兵馬俑博物館(진시황병마용박물관)이다.


관람순서는 앞에 강당처럼 만들어 놓은 1호갱으로 들어가서 3호갱과 2호갱 순서로 보고 나온 다음 우측에 보이는 박물관을 보고 나오면 된다.

1호갱 건물 상단부에 진병마용일호갱대청(秦兵馬俑壹號坑大廳)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병마용은 1974년3월양지발(楊志發)이란 농부가 우물을 파다 발견했고 1979년10월에 1호갱 전시동을 열었다.


1호갱의 병마용은 4개 부대로 이루어져 앞에 선봉군, 가운데 중군, 좌우에 수비군이 있고, 가장 뒤에 후위군이 있는데 후위군쪽은 아직 복원이 안되서 잔해형태로 되어있다. 선봉군은 3열 횡대로, 매열마다 68명의 병사가 좌우로 긴 형태를 취하고 병사의 수는 204명이다. 중간 쯤에 전차유적과 근대묘혈이라 써진 안내판이 있고 9개부대의 중군은 앞부분에 4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배치되어 있다. 개개 부대는 5m 깊이의 땅 속 3m 높이의 토담 안에 4열 종대로 서 있다.

도용 군대는 춘추전국 시대와 짧았던 진나라 시대의 중국 군사 조직을 짐작케 하고 병사들의 옷과 무기에서부터 말의 고삐까지 세세한 묘사가 고고학적 가치를 높인다고 한다.

17번의 탄 흔적은 진(秦)이 망하고 유방(劉邦)과 천하를 놓고 싸우던 항우(項羽)가 도굴과 방화를 자행했다고 한다. 1호갱의 깊이는 약 5m이고, 길이는 230m, 폭은 62m에 11개의 갱도가 있는데 지하 5m 깊이에 병마용을 세운 뒤 나무판을 가로로 놓아 그 위를 가렸다. 나무판 위에 다시 흙을 5m 정도로 덮어 위장을 하여 그동안 그 위에서 농사도 짓고 무덤도 만들었는데 도굴 당시 나무판 부분이 불에 탄 것으로 보인다.


근대묘혈(近代墓穴) 부분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누군가가 병마용 위에 무덤을 만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갱과 갱 사이의 둔덕에 무덤을 만들어서 병마용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병마용이 도굴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2200년전에 만들어진 벽돌들이 발굴되어 있는데 불량품이 나오지 않도록 벽돌에 만든 사람의 이름을 적도록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잘못 만들면 연좌제를 적용하여 같은 그룹에 있는 사람들을 같이 벌하여 품질관리를 했다고 한다.

중간쯤에는 발굴현장을 공개하고 있는데 발견 당시에는 병용들에 채색이 되어있었지만 노출이 되자 얼마 안되어 모두 탈색되어 회색으로 변했다. 그래서 4, 5호갱은 발굴기술이 발전할 때까지로 발굴을 미루고 있다. 모든 병마용의 얼굴과 머리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머리가 박살난 용은 복원을 못한다. 발굴된 3갱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 개의 전차, 520 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얼만큼의 병용과 부장품들이 묻혀있을지 아직 모른단다.


병사용은 신분에 따라 장군용, 장교용, 사병용으로 나눠지고 임무에 따라 궁병, 노병, 보병, 기병으로 나누어진다. 뒤 쪽에는 복구되어 제자리를 찾고 있는 병용들이 줄지어 서있다. 복원 중인 병용과 마용들을 보며 이제 3호갱으로 간다.


3호갱은 凹자형 구조이고, 면적이 500㎡도 안 돼 병마용갱 중 규모가 가장 작으며 1989년 문을 열었다.

38번 발굴지에서 고사용 동물뼈가 나오고 병용도 전투병이 아니라 호위병인 것으로 보아 3호갱은 지휘부, 사령부에 해당하는 군막(軍幕)으로 볼 수 있다. 요자형 가운데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지휘부 마차가 배치되어 있는데 말은 보이고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차는 목재로 만들어져 소실됐기 때문이다. 마차 뒤에는 말과 마차를 다루는 어수용(御手俑)이 4개가 서 있는데 어수용은 말고삐를 잡고 임금이나 장군이 탄 마차를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3호갱에서는 병용 66명, 마용 4필, 목제 전차 1승이 발굴되었다. 바닥을 보면 그냥 흙바닥이 아니라 벽돌을 찍어서 바닥에 깔아 침식을 예방했다. 병용들의 손을 보면 무기를 잡고 있는 모습인데 항우의 병사들이 무기를 약탈했다는 설이 있다.

병용들의 머리와 몸통은 비어있는데 외부에서 부분으로 제작되어 여기서 조립되었고 병사용의 평균 신장은 185㎝로 당시 병사들이 건장한 체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마용을 실물크기로 제작한 것이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영국 BBC가 주장했다.

한쪽에 채색된 손과 신발, 채회용두-채색된 도용의 머리들 사진을 전시해 놓았다.

이제 3호갱을 나와 옆에 있는 2호갱으로 간다. 2호갱은 1976년에 발견하여 세동중 가장 늦게 1994년에 전시동이 문을 열었다. 2호갱은 동서 124m, 남북 98m의 ㄴ자형 군진으로 보병, 기병, 전차부대가 혼성되어있으며 도용과 도마는 1,300여 점, 전차는 80여대 그리고 청동 병기가 만 여 점 발견되었다. 발견된 보물들은 좌측의 진열장에 전시해놓았다.


진열장 안의 병용은 자세히 볼 수가 있는데 먼저 완전한 상태로 발굴된 궤사용(跪射俑)(跪:무릎꿇다, 射:쏘다 俑:인형)을 먼저 본다. 궤사용은 보병으로 무릎쏴를 하는 궁수이고 입사용(立射俑)은 서서쏴를 하는 임무를 맡는데 궤사용은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다리를 구부려서 왼쪽 팔꿈치를 왼 무릎 위에 올려 고정하고 있다. 머리 상투의 머리카락과 귀의 귓바퀴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있고 손은 손톱과 손금까지 자세하게 조각하였다니 도용제작에 엄청난 공을 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의 상투가 삐뚤어져있는데 적군과 아군을 쉽게 구별하기 그렇게 했다고 하고 얼굴 표정은 적에게 무섭게 하기위해서 엄하거나 화난 표정으로 웃음기를 없앴다. 상투의 머리카락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모습이 대단하다.

갑옷에는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채색이 완전하게 보존됐다면 당삼채보다 더 훌륭했을듯 하고 신발바닥의 문양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있다.


기병과 안마용(鞍馬俑)은 쌍으로 전시되고 있는데 기병이 고삐를 잡고 안마를 끌고 가는 모습이고 말은 길이가 2m, 높이가 1.7m 정도로 살아있는 말처럼 생동감이 있다.

다음에 보는 서있는 모습의 중급(中級) 군리용(軍吏俑)은 지금으로 치면 장교에 해당하는데 목까지 덮는 긴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갑옷을 걸쳤으며 머리에는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요대를 찼다.

고급(高級) 군리용(軍吏俑)은 지금으로 치면 장군에 해당하는데 장군은 긴 저고리를 두 겹 겹쳐 입고, 그 위에 갑옷을 걸쳤으며 배도 나오도록 묘사되어 있는데 중국에서 배나온 사람을 장군배라고 부른다고 한다. 신발도 코가 약간 들린 형태이고
머리와 관의 모습이 장교와는 다르다.


궤사용과 한 팀인 입사용(立射俑)은 왼팔로 활을 잡고 오른팔은 가슴부위로 올려 시위를 잡아당기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활이 없어 마치 택견의 준비 자세를 보는 듯하지만 병마용 중 가장 생동감 있는 모습이다.

한쪽에 발굴되어 아직 짝을 찾지못해 복원되지않은 파편들이 쌓여있는데 파편마다 번호표를 붙여 놓았다.

이제 박물관에 가는데 이름이 진시황제릉문물진열청(秦始皇帝陵文物陳列廳)이라고 되어있고 세계문화유산 표시가 뚜렷하다. 입구 쪽에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박물관에서 제일 중요한 전시실인 동거마 전시실에 들어간다.

동거마(銅車馬)는 사후 부장용으로, 말과 마차의 크기가 실물의 절반 정도 된다. 동거마는 제왕의 순행용 마차로 장검을 찬 어관이 서서 말고삐를 잡고 있다. 동거마 전시실에 있는 임금이 타는 마차인 온량거(轀輬車)로 좌우 폭이 126㎝ 앞뒤 길이가 70㎝인 수레이다.

박물관은 전에도 본 적이 있어서 중요한 마차만 대충 보고 바로 나왔다. 전체적으로 일행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진시황릉을 떠나 화청지로 간다.


서안 진시황릉 동영상으로 보기 클릭 https://youtu.be/etNewqDa7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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