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풍에 대한 소회
신사/박인걸
나무는 계절을 등에 업은 채 서 있고
잎들은 오랜 약속을 풀어내듯 서서히 붉어진다.
빛을 태워낸 시간이 색(色)으로 남아
늙음이 남긴 진심의 농도가 된다.
머묾과 떠남이 같은 선 위에 놓일 때
단풍은 주저 없이 계절을 완수한다.
우리도 무엇을 버릴지 정하지 못한 채
자신의 불꽃으로 길을 밝히며 걸어간다.
붉음은 소멸이 아닌 결의의 표상
완전히 물들어야 끝을 알릴 수 있다.
흩어짐은 패배가 아니라 귀의(歸依)이며
침묵 속에서만 진실은 제 온도를 찾는다.
가을의 길 끝에서 나는 문득 묻을 때
내려놓을 때 아름답다고 단풍은 속삭인다.
사람은 자신이 남긴 색으로 기억되며
곱게 타오를 때 그 빛이 등불이 된다.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돼지풀을 보면서 - 김승기 (0) | 2025.11.11 |
|---|---|
| 갯메꽃 - 김승기 (0) | 2025.11.10 |
| 귀룽나무 꽃 - 백승훈 (0) | 2025.11.06 |
| 은행나무/鞍山백원기 (0) | 2025.11.04 |
| 11월에는 / 정심 김덕성 (0) | 2025.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