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에 호텔을 출발해서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로 간다.
곡부는 중국말로 취푸이다.
가는 길에 유노근대무(刘老根大舞台) 공연장이 보인다.
草民(시골사람)刘老根이 도시로 나와 성공한 이야기를 코미디로 공연하는 극장인데 규모도 꽤 크고 인기가 많다고 한다.
중국이나 우리나 가난을 벗어나 발전해갈 때 대박신화나 입지전적 스토리가 인기를 끄나 보다.
10시 10분 쯤 곡부 톨게이트를 벗어나니 거대한 공자열국행이라고 써진 동상이 우리를 환영한다.
56세에 제자들과 송, 진, 위, 채, 재, 초나라 등을 10여년 이상 주유하는 모습을 표현해놓은 것이다.
공자가향환영닌(공자의 고향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이라고 써진 입간판이 공자의 고향에 온 것을 실감나게 한다.
10시 20분 공묘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한다.
진입로는 황제가 가는 중간 길과 신하들이 가는 좌우길로 3도 형태이다.
진입로 끝에는 공자를 위해 명나라때 쌓은 곡부명고성(曲阜明古城)의 정문격인 성문인 남문이 있다.
성문 앞에는 "5성급 관광구 공묘 공부 공림"이라는 돌표지판이 있고 그 뒤에는 육예(六藝)를 설명하는 간판이 있다.
공묘는 공자사당, 공부는 공자의 삶터, 공림은 공씨네 가족묘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성문위에는 붉은 글씨로 만인궁장(萬仭宫牆)이라고 새겨져있는데 공자의 높은 학식을 표현한다.
논어에서 자공이 한 말로 "지식이 높으면 높은 담처럼 그 안을 볼 수가 없다"며 공자를 존대했다.
여기부터 대성전까지 겹겹이 문과 사당이 있는데 왕조가 바뀔 때마다 증축하며 양파처럼 쌓인거다.
그러니까 제일 중앙에 공자가 살던 노나라 흔적이 있고 제일 바깥쪽인 이곳은 청나라때 지어진 것이다.
성문을 들어가면 바로 또 하나의 성문이 나온다.
성곽에 난 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에 설치한 이중 성곽인 옹성(甕城)형태로 월성(月城)이라고도 했다.
두번째 성문을 지나면 문위에 금성옥진(金聲玉振)이라고 써진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이 보인다.
坊은 충효나 정절을 기리기 위한 패방(牌坊)을 말한다.
금성옥진(金聲玉振)은 사상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존중받게 다는 의미가 있는데 맹자가 공자의 성덕(聖德)을
음악에 비하여 찬양한 말이다.
맹자(孟子)에 “음악은 금소리(鍾)로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옥소리(磬)로 수합한다(金聲而玉振之也)”하였다.
금(金)은 종(鍾), 성(聲)은 선(宣), 옥(玉)은 경(磬), 진(振)은 수(收)를 의미한다. 팔음을 합주할 때 먼저 종을 쳐서 그 소리를 베풀고 마지막에 경을 쳐서 그 운을 거두어 주악을 끝낸다.
이것에 비유해서 금성옥진은 지덕(智德)이 갖추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서 영성문(棂星门)이라고 써진 첫번째 출입문을 지난다.
영성(棂星)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농업의 신으로 받들어지는 별이니 그 의도를 알겠다.
기둥이 궁궐입구의 화표처럼 생긴 삼문으로 청나라 건륭제가 직접 '영성문(棂星门)'이라고 썼다.
영성문을 지나면 바로 태화원기방(太和元氣坊)인데 우주 만물을 창조하는 기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 다음에 세번째 패방인 지성묘방(至聖廟坊)은 명나라 홍치 13년인 1500년에 만들고 청나라 옹정제 7년(1729)에 중수된 것이다. 원래는 선정묘(宣圣庙)였으나 청나라 옹정제때 수리하면서 지성묘(至圣庙)로 바꾸었다.
패방은 문이라는 성격보다는 기념비적인 성격이 강해서 성스러운 공자의 사당으로 들어선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지성묘를 지나면 공묘의 두 번째 문인 성시문(聖時門)이 나오는데 여기가 청과 명의 경계이다.
1415년 명나라 영락 13년에 공묘의 대문으로 처음 만들었고 청나라 옹정 8년인 1730년에 옹정제가 이름을 지었다.
맹자에 나온 말 중 "孔子 聖之時者也"에서 따온 말로 '공자는 시대를 초월한 현인이다'라는 의미다.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는 북경 자금성의 오문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성시문을 지나면 꽤 넓은 정원이 나오는데 벽수교(璧水橋)까지 박석을 깔아 놓은 삼도(三道)가 이어지고 넓
은 정원에 측백나무가 울창하다.
지금 공묘의 땅은 노나라 때 애공(哀公)의 집이었는데 공자가 죽자 공묘로 기증했다.
벽수교(璧水橋)는 명나라 홍치 13년(1500년)에 만든 돌다리로 삼도(三道)의 형식으로 세개의 다리로 되어있다.
삼도는 길을 세개 만들어 가운데는 황제가 좌우는 신하들이 가도록 만든 도로이다.
벽수교를 지나면 3번째 출입문인 홍도문(弘道门)이 나온다.
홍도문은 명나라 홍무10년(1377)에 세워진 것으로 명나라 이전부터 원래 공묘의 출입문이었다.
우리나라 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다포계 공포 모양으로 홍도문 편액은 청나라 옹정제가 논어의 구절을 인용해 이름을 지어 현판을 하사한 것이다.
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오는 인능홍도(人能弘道) 비도홍인(非道弘人)인데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게 아니다."라는 뜻이다.
홍도문을 지나면 정원이 다시 나오고 좀 더 걸으면 4번째 출입문인 대중문(大中门)이 나온다.
대중문은 북송대에 세워져 공묘(孔廟)의 출입문으로 이용됐다.
현판 글씨는 청나라 건륭제가 직접 쓴 것이고 현재의 건물모습은 명나라 홍치 13년(1500)에 중건된 것이다.
그 다음에는 북송대에 처음 세워져 출입문으로 사용됐던 제5문인 동문문(同文門)이 나온다.
계속 문이 나와서 정신이 없는데 왕조를 바꿔가며 중건하면서 궁궐양식을 따서 이런 모습이 되었단다.
청나라 강희제때 참동문(參同门)이라 불렀다가 옹정제때 동문문(同文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동문문 옆에는 1468년 명나라 성화제(헌종)의 친필을 새겨놓은 공묘안의 많은 비석 중에 가장 유명한 성화비가 있다.
글씨가 단순하며 힘이 있으며 공자를 칭송하는 내용이 가장 훌륭하다고 한다.
동문문을 지나면 명 홍무제 주원장이 세운 홍무비정(洪武碑亭)과 홍무비가 나온다.
1371년에 처음 세웠으나 소실되고 1503년에 다시 세워졌다.
공묘에 있는 비석중 체적이 가장 큰 비석이며 문화대혁명 때 유일하게 손상되지않았다.
그 다음에 나오는 규문각(奎文阁)은 북송 진종대(천희 2년, 1018)에 세워진 높이 23미터의 목조건물이다.
황제가 내린 서화를 보관하던 장서루(藏书楼)로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지었졌다고 한다.
금나라 장종때(명창 2년, 1191) 규주문장(奎主文章)에서 따서 이름이 붙여졌고 중국최고의 목조건축물로 인정받는다.
규문각 옆에는 건륭황제가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고 힘들어서 기대고 쉬었다고 용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나무가 있다.
황제가 쉬고난 뒤에 황제의 무늬가 생겼다고 하는데 믿어 말어...
규문각을 지나면 총 13개의 비각이 있는 13 비정(十三碑亭)이 나오는데 금대에 2개, 원대에 2개, 청대에 9개를 세웠다.
이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이 청나라의 강희제가 북경의 서산에서 가져온 가장 큰 비석으로 65톤에 이른다.
그 당시에 저런것을 운반한 것이 불가사의한데 운하를 이용하고 겨울에 물을 뿌려 얼린 뒤에 끌고왔다고 한다.
공묘의 하이라이트인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대성문(大成門)을 통과하게된다.
대성문 양쪽으로도 문이 있는데 동쪽이 금성문(金聲門)이고 서쪽이 옥진문(玉振門)으로 3문 형태이다.
우리는 문무백관들의 문이었던 금성문으로 들어갔다.
금성.옥진문은 대성문과 함께 송나라 숭녕3년(1104)에 처음 세워졌고 현판은 청 옹정제 글씨다.
문을 나서면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행단(杏壇)이 나온다.
금나라때 처음 세워졌고 명나라때인 1389년에 중건되었다.
이때 살구나무도 다시 심어졌다고 한다.
행단 내부에는 청나라 건륭제가 세운 행단찬비(杏壇贊碑)가 있다.
한무제가 심었다는 2100년된 측백나무가 나오고 바로 공묘의 주사당인 대성전(大成殿)이다.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대성전(大成殿)의 편액 황금빛 글씨도 청대 옹정제가 썼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알고있는데 의외로 문화사업을 많이 했다.
대성전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공자사당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현재의 대성전은 명나라 홍치12년(1499)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크게 중건한 것이다.
대성전의 크기는 동서 48.7m, 남북 24.89m, 높이 24,8m 규모이다.
대성전은 중국의 3대 궁전 건물의 하나이다. 다른 두개는 북경자금성의 태화전(太和殿)과 태산대묘(岱廟)의 천황전(天貺殿)이다.
대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황제의 가마가 지나가던 길인 답도(踏道)형태를 취하고 있다.
대성전 안의 닫집 안에는 공자상이 위패와 함께 모셔져 있고 종묘제례 등에 사용한 전통 악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입구 위에는 옹정제의 글씨로 생민미유(生民未有: 백성이 생긴 이래 공자와 같은 사람은 없다) 현판이 걸려있고
공자상 위에 강희제가 쓴 萬歲師表[만세사표(오래도록 스승이자 표상이다)]와 광서제가 쓴 斯文在茲[사문재자( 모든 문화와 문명이 공자 안에 있다)]의 현판 두개가 걸려있다.
대성전을 벗어나면 공자가의 족보비가 있는 곳이다.
42대까지 적혀있고 보니 8대손까지는 독자로 내려왔다. 손이 귀한 집이네...
조그만 소슬문을 지나면 2천년 넘게 버티고있는 노벽(魯壁)이 나온다.
공자가 살던 노나라때 세운 벽이란 뜻일텐데 아직 버티고 서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한 2천년???
진시황 시기에 있었던 분서갱유 사건 때 공자의 9대 손자 공부(孔鲋)가 논어, 상서, 예기, 춘추, 효경 등의 유가 경전을
이 담벼락에 감추어 보존했다.
한무제가 노공왕을 시켜 이곳을 수리할 때 논어와 효경이 발견되었다.
이 담벼락이 없었으면 조선의 유교분쟁도 없었을까...
노벽(魯壁) 앞에는 공자가 여기에 살던 시절 사용하던 공택고정(孔宅故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공자가 살아있을 때 마셨던 것으로 물이 워낙 순수하고 깨끗하여 성수(聖水)라고도 부른다.
오냐 오냐하면 한이 없다. 그냥 우물이었을텐데....
우물을 지나면 시례당(詩禮堂)이 나온다.
공자가 아들인 공리(孔鲤)에게 시와 예를 교육했던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교육은 부모의 가장 크고 힘든 일이다.
의자단상 위에는 즉고칭선(則古稱先)-옛것을 법칙으로 하여 선조를 논해야한다는 현판이 붙어있다.
액자 테두리에 용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황제가 내린 것 같다.
송나라때 처음 지어졌으며 청나라 때는 황제가 수시로 찾아와 제를 올리고 황제의 아들 교육도 이곳에서 시켰다.
출구로 나가는 길에 또 비림이 있다.
공묘 안에만 2000개가 넘는 비석이 있다고 한다.
한시간쯤 걸려 공묘탐사를 마치고 대문을 나와 기념품 판매거리를 지나 이제 공부(孔府)로 간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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