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부를 나와 공림(孔林)으로 가기위해 틈실한 말이 끄는 마차를 탄다.
곡부 안에서 관광객은 릭샤 나 마차 또는 택시를 이용해서 이동하는데 마차로 공림 입구까지 10분 정도 걸린다.
중간에 고성의 북문도 보이고 느긋하게 거리구경을 할 수있어서 좋다.
마차를 내린 입구에는 비각이 하나 있고 대성지성선사공자신도(大成至聖先師孔子神道)비석이 서있다.
1594년에 세운건데 공자님에게 가는 길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좌측에 궐리중수임묘비(闕里重修林廟碑)라는 비석이 하나 더 있고 가운데 공림의 외문격인 만고장춘방(萬古長春坊)이란 근사한 패방이 서있다.
명나라 때인 1594년에 짓고 청 옹정제 때 중수한건데 기둥에는 용과 봉황이 조각되어있다.
여기서부터 공림 정문까지 삼도 형식의 길이 1Km쯤 나있는데 중앙길을 신도(神道)라 부른다.
가이드가 기분이 좋은지 연세드신 분을은 릭샤를 태워준다.
곡부여행은 우여곡절을 격었다. 처음에 계약할 때 일정표에는 공묘 하나가 들어있었는데 출발시 확정일정표에는 공묘가 빠지고 공림으로 바뀌었다. 공묘는 봐야했기에 일행들과 상의해서 30불을 추가로 내고 옵션으로 삼공(공묘, 공부, 공림)을 보기로 하고 일정을 진행한거다.
귀국하여 여행사에 항의했더니 30불을 환불해 주었다. 전화위복이랄까 결과적으로 더 좋게 되었다.
신도 중간 우측에 공자생태원도 있는데 들어가지 못했다.
신도길이 끝나는 곳에 넓은 광장과 삼문 형식의 지성림(至聖林) 패방이 있다.
패방은 어떤 사람의 공로와 덕행을 알리려고 세운 건축물이다.
공림이 시작되는 문으로 대림문(大林門)이라고도 하는데 영락제 때인 1424년에 처음 지었고 청대에 중수했다.
입구로 들어는데 요금표가 연표 150, 공묘 90, 공부 60, 공림 40위안라고 되어있다.
연표(联票)는 통합입장권을 말하는데 공묘와 공부를 보면 공림은 그냥 보라는 정도다.
공림(孔林)은 공자가의 가족묘지로 60만평이 넘으니 대충 여의도의 3/4으로 엄청나다.
그래서 공림을 돌아보기 위해서 지붕만 있는 미니셔틀을 이용한다.
셔틀을 타고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공림의 원래 정문인 지성림문(至圣林门)이 보인다.
원대에 처음 세워졌고 명대 홍치7년(1494)에 중건되었다.
이 문의 자리는 노나라 성(魯城)의 북문이었다고 한다.
지성림문은 지나서 가꾸어지지 않은 묘지들을 보며 한참 간다.
공림안에는 3000기가 넘는 묘지가 있고 4000개가 넘는 비석이 있다고 한다.
볼 만한 것이 나오면 전동차가 속도를 줄인다.
처음 속도를 줄인 곳은 공자 76대손 연성공 공령이(孔令貽)의 묘다.
묘를 지나면 유종재념(儒宗在念)이라고 써진 문이 나온다.
공자의 사상이 유학의 종주임을 언제나 유념하라는 뜻이다.
좀 더 달리면 공자의 64대손 공상임(孔尙任)의 묘가 나온다.
공상임은 청조의 이름난 연극인으로 희곡 도화선(桃花扇) 이란 작품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도화선은 소설사상의 홍루몽(紅樓夢)에 비길 만한 청대 문학의 걸작이라고 한다.
봉직대부(奉直大夫) 호부광동청리 (戶部廣東淸吏) 사원외랑(司員外郞) 동당선생지묘(東塘先生之墓)라는 비문이 있다.
그 다음에는 72대 연성공 공헌배(孔憲培)의 부부의 묘가 나오는데 공림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묻힌 곳이다.
공헌배의 부인이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딸인 우씨이기 때문이다.
청나라 황제의 딸이 왜 우씨냐고???
건륭제의 딸 우씨가 사주가 안좋아서 공자가로 시집을 보내기로 했는데 만주족과 한족 통혼 불가의 계율이 있어 청조 대신
우민중(于敏中)의 양녀로 만들어 공자가로 시집 보냈다.
행복하게 잘살고 공림데도 묻혔다. 그래서인지 건륭제는 8번이나 공묘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특별히 묘 앞에는 도광(道光)황제가 고모 우씨를 위해 만든 우씨방(于氏坊)이란 패루(牌樓)가 있다.
우씨방의 가운데에 파란 부분이 청나라의 도광제(道光帝)가 쓴 제문이다.
이곳을 지나 가면 드디어 수수교(洙水橋)라고 적힌 패방과 수수교가 나오는데 여기가 공자묘의 입구이다.
여기서 전동차는 우리를 내려놓고 가버린다.ㅠㅠ
수수는 고대 노나라 수도때부터 있었던 해자로 인공하천인 셈이다.
삼문형식의 패방 수수교(洙水桥)는 가정(嘉靖) 2년 1523년에 세워진 것이다.
수수교를 지나면 양쪽에 비석이 서있는 진입로를 거쳐 명나라 영락제12년(1414)에 처음 세워졌고 청왕조대에 중건되었다는 묘문(墓门)이 나온다.
묘문을 지나면 공자묘로 들어가는 길인 공자묘통도(孔子墓通道)이다.
공자길에는 능역을 지키는 석물인 화표(华表), 문표(文豹), 녹단(甪端), 옹중(翁仲)이 오가는 행인을 보며 서있다.
화표(华表)는 중국 궁전이나 능묘 입구에 돌기둥을 한쌍으로 세운 것이다. 위 사진에 보인다.
문표(文豹)는 표범과 비슷한 석물로 매우 용맹한 상상 속의 동물이다.
녹단(甪端)이라는 상상 속의 동물은 하루에 18.000리를 달리고 사방 각 언어에 능통하며 충직한 동물이다.
나라가 넓고 언어가 다양한 넓은 국토를 가진 중국에서 상상으로라도 필요했던 동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늘 묘를 지키는 옹중(翁仲)이라는 석인상이 마지막으로 버티고 서있다.
옹중을 지나면 비로소 홍치 10년(1494)에 지어진 제향시설인 형전(享殿)이 나오는데 향을 피우거나 공자에 표를 올리는 중요한 장소다.
형전을 지나면 자공이 나무를 심었다는 자공수식해(子貢手植楷) 비석이 보인다.
황련수(黃蓮樹)라는 나무인데 자공이 공자상에 3일 늦어서 나무를 심고 식자에서 한획을 뺐단다.
그리고나서 자공은 움막을 짓고 3년을 더 상을 치뤘는데 그곳을 자공려묘처(子贡庐墓处)라고 한다.
자공이 심은 황련수는 1712년 강희년간 51년 벼락을 맞아 불타고 뿌리 부분만 남은 것이 보존돼있다.
그 뒤에는 황제들이 왔을 때 쉬고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들이 있는데 앞에서부터 건륭주필정(乾隆驻跸亭), 강희주필
정(康熙驻跸亭), 송진종주필정(宋真宗驻跸亭)가 있다. 건륭제, 강희제, 송진종이 지은거다.
그리고 묘지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제일 먼저 공자의 손자 공극(孔極)의 묘가 보인다.
공극은 맹자의 스승이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사수후(泗水侯)라는 묘비가 보이는데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의 묘다.
사수는 공림 부근을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사수(泗水)인데 이 지역을 관리하는 관리의 명칭이다.
공리는 50세에 죽어 72세까지 산 공자보다 3년 일찍 죽었다.
그리고 드디어 비석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라고 써진 공자의 묘소이다.
그런데 끝에 왕자의 마지막 획이 보이지않는 좀 이상한 필체이다.
강희제가 왕자를 싫어해서 세로선을 길게하고 담을 쌓았단다.ㅋㅋ
공자묘 기단석을 지나 담 너머로 들여다봐야 글자가 제대로 보인다.
중국 왕조의 부침에도 변치않았던 공자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오죽하면 황제가 불안한 딸을 시집보내고 싶을 정도로 안정된 가문이었을까...
열심히 인증사진을 찍고 돌아나와 다시 마차를 타고 육예성 근처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이동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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