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30분 Fiuggi의 호텔을 출발하여 로마에서 195Km쯤 떨어진 폼페이로 간다.
8시쯤 까실리나(Casilina)근처 휴게서에서 한번 쉬고 계속 가면 나폴리를 지난다.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봉우리 두개가 보이는 섬이 미국인들이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 1위라는 카프리섬이다.
우산소나무 숲이 멋지게 펼쳐있는 풍경을 지나 9시쯤 폼페이 유적지에 도착한다.
입구에 Scavi Di Pompei(폼페이 발굴지)라고 써있는데 Porta Marina는 항구로 통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폼페이가 사르누스(Sarnus, 지금의 사르노)강 어귀의 항구도시 였기때문에 사용하는 이름이다. 입구 옆은 옛날에 배를 대던 부두였다고 하고 그 우측에 부두에서 내린 짐이 도시로 들어가던 입구로 두개의 아치형 문인 마리나 문 (Porta Marina)이다. 왼쪽 작은 문이 인도이고 우측 큰 아치가 마차가 다니던 길이다.
폼페이는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단 18시간만에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도시는 3m 가량의 화산재로 뒤덮였고 도시민의 10% 정도인 2000명 정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잊혀졌던 도시는 1592년 폼페이운하 건설과정에서 건물과 그림이 발견되면서 모습을 드러내며 발굴이 시작되었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4/5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나온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마리나문의 좁은 인도는 막아놓아 마차길로 들어가는데 돌로 포장된 길들이 인상적이다. 하수도가 없어서 차도가 하수도 역할을 하는데 인도는 한단 높고 길 중간중간에 두대가 교행할 수 있는 마차길을 남기고 징검다리처럼 인도를 연결했다. 차도 옆에 돌에 홈이 파여 있는 곳은 말을 묶었던 자리라고 한다. 큰 돌 사이에 작은 흰 돌이 박혀있는데 야간에 보행을 도와 조명을 해주던 야광석이다.
폼페이는 도로가 사각형으로 정비된 계획도시였다. 반듯한 사각형 형태로 도로가 나있고 길 옆에 각각 다른 얼굴부조가 있는 수도가 있는 우물이 64개가 있는데 주소를 알려주는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전에 현재와 비슷한 파이프를 사용한 상수도 시설이 있어서 우리를 놀라게하지만 수도파이프에서 납성분이 검출된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납의 유해성을 몰랐던 것 같다.
길을 가다 보면 길 바닥의 돌에 남성의 성기 모습으로 방향을 표시했는데 물을 부으면 잘 보이고 당연히 윤락가 방향을 가리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것은 바퀴벌레와 윤락가라더니...그참~~~
화산재 밑에서 윤곽을 유지했던 발굴된 옛날 집터를 보며 과속방지턱의 모양으로 보아 일방통행 길임을 식별할 수 있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나뭇가지가 보이는 프레스코벽화가 그대로 남아있다. 프레스코(Fresco)는 'a fresco' (방금 회(灰)를 칠한 위에)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낱말로 벽에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염료로 그림을 그린 후에 말리는 벽화의 대표적인 기법이다. 2천여년 전의 프레스코 벽화가 문양을 유지한 채 당시 모습 그대로 벽을 지키고 있다.
프레스코화를 지나니 안내판없이 벽에 뾰족하게 나온 철심같은 것이 홍등가의 표시라고 하는데 남근을 상징하는 듯하다. 홍등가길의 옆에 마차 자국이 파인 것은 그만큼 마차들이 많이 지나다녔다는 증거란다. 돌에 파인 자국이 일부러 판 것 같지도 않은데 바퀴자국이 선명해서 놀랍다. 루파나르(
색시집 내부는 요즘의 룸살롱처럼 다수의 침대가 있는 방이 있고 다양한 그림과 체위 그림이 춘화도처럼 그려져있다. 방의 침대 크기로 보아 당시 평균 키가 140센티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한다.
홍등가를 나와 바람의 신이 부조로 되어있는 우물가에 가니 납을 주재료로 써서 납중독의 원인이었이 되었던 2천년 전의 수도관이 선명하게 땅위로 드러나 있다.
2천년의 세월을 그대로 안고있는 건물들은 먼저 벽돌로 쌓고나서 대리석을 입혔는데 양모 직물을 팔던 에우마키아(Eumachia)빌딩이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에우마키아는 원래 여사제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에우마키아의 석상이 발견되었다.
그 바로 옆에 베스파시안 사원(Tempia di Vespasiano)이 있는데 베스파시아누스라고도 한다. 베스파시안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건설한 로마의 황제(재위 69~79년)였고 79년 6월 24일 사망했는데 두 달 후에 폼페이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 폭발 당시의 황제는 그의 아들이자 로마제국의 열 번째 황제인 티투스(Titus)였고 이곳은 황제를 신격화한 흔적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폼페이의 시장이었던 마첼럼(Macellum)이 나오는데 오늘날 재래시장처럼 회랑으로 둘러 쌓여 1평 남짓한 공간의 점포로 구성되어 있다.
옛날에 약국이었던 곳이 나오고 당시 은행이었던 곳에 도착하는데 외환 환전을 하기도 했던 곳이어서 발굴 당시 많은 나라의 동전들이 출토되어 은행임을 추정한다고 한다. 출토된 동전들은 지금은 나폴리의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전시되고 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로마 향락문화의 상징이기도 한 Terme del foro(목욕탕)을 구경한다.
공중목욕탕 입구를 들어서면 목욕을 하기전에 운동을 하던 헬스장을 지나고 그대로 보존되어 욕조도 보게된다.
목욕탕 바닥은 잔 타일로 마감했으며 남탕여탕이 있었고 스팀이 설치되어 사우나도 즐길 수 있었다. 앉아서 땀과 때를 닦고 숨을 고르던 돌의자가 있고 증기가 나오던 증기구가 있어서 습식 사우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쪽에 있는 구멍은 더운 공기가 배출되서 목욕탕 온도를 조절한 것으로 보이고 지붕 쪽의 채광창도 환기구 역할을 겸한 것이다. 채광창 아래에 수염있는 남자의 얼굴 모습이 남탕이라는 표시인 듯 하다.
누워서 때를 밀거나 쉬거나 했을 침대가 보이고 2천년전의 목욕탕 내부 장식 그림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도 있다. 밖에서 돌을 데워다가 침대에 올려놓고 찜질방 효과를 냈다고 한다.
벽쪽으로 옷을 보관하던 사물함이 배치되어 있는데 각각의 구멍 앞에 조각된 아틀란테스(Atlantes)가 번호의 역할을 했다. 아틀란테스는 기둥 윗부분을 짊어지고 있는 남성조각상을 말하며 따라서 사물함 좌우에 있는 아틀란테스는 각기 다른 의상이고 다른 얼굴 모양을 하고있다.
복원개념도를 보면 물을 데우기 위하여 벽에서 불을 피우고 돌이 달구워지면 물이 데워져 40도를 유지한다.
환기구가 있는 곳은 별도 공간으로 되어있고 목욕탕내에서 좀 시원한 곳이어서 환기구 아래에 분수욕조가 설치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찬물을 끼얹는 곳이다.
천정과 벽에 홈으로 줄을 파놓아 천정에 맺힌 물방울이 벽쪽으로 흐르게 해놓아 물방울에 맞는 것을 막아줬다.
그리고 내벽과 외벽이 있어 벽사이의 공간이 목욕탕안의 온도가 급격히 변하지 않도록 한다.
목욕탕을 나오니 음료와 음식을 제공했던스넥바와 비슷한 선술집(Thermopolium Caupona)이 있어 동선을 상상하게 해준다. 목욕하고 먹고 한잔하고~~좋다~~
음료와 음식을 제공했으나 이층에서 매춘도 이루어졌을것으로 보고 있다. 폼페이가 지중해에서 들어온 여러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상거래를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타볼라 칼다(Tavola Calda)라고 부르던 조리대의 구멍은 팽이처럼 바닥이 뾰족한 질그릇들을 걸어서 사용한 던 곳이라고 한다.
바닥에 개조심을 의미하는 큰 개의 그림을 보며 빵집(Bakery)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곳에 도착한다. 밀가루를 갈았던 멧돌과 함께 빵을 구웠던 오븐들이 여러개 보인다. 당시에도 주식인 빵을 베이커리에서 조달했던 것 같다.
빵집을 둘러본 우리는 폼페이의 중심지인Civil Forum(시민광장)인 제우스 광장이라고도 부르는 넓은 광장에 도착한다.
광장에 있는 주건물인 제우스신전(Temple of Jupiter)은 그리스의 12신중 주신인 쥬피터(제우스), 유노(헤라), 미네르바(아테나)를 모신 신전이다. 보이는 기둥들 위에는 제우스를 비롯해서 헤라, 아폴로, 포세이돈등 많은 신의 동상들이 있었다고 한다. 신들의 청동상은 녹아 없어지고 지금은 기둥만 덩그라니 남아있다. 제우스 신전 뒤쪽으로 폼페이를 집어삼킨 베수비오산은 아직도 폼페이를 말없이 내려다 보고 있다. 제우스 신전 앞의 사각형 돌은 대중연설을 하던 연단이란다.
제우스광장은 시민들이 모이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이었고 신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은 기원전 2세기 무렵 응회암으로 만들어졌고 후에 석회암으로 대체 보수되었다. 고대 로마의 시장과 법정을 겸비한 공공 건물인 바실리카(Basilica)는 모두 2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 졌고 후에 성당의 건축 양식으로 쓰여 지금은 성당을 바실리카라 부른다. 제우스신전을 중심으로 광장은 회랑으로 둘러 쌓였으며 회랑을 만들었던 기둥들이 남아있다. 남쪽에는 시청사 건물인 Municipal Office가 자리잡고 있는데 Municipal Office는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원로원, 집정관, 집행부를 위한 건물들이다. 복원 중인 회랑의 기둥들과 복원을 기다리는 유적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곡물 계량소(Mensa Ponderaria)였던 곳은 지금은 발굴한 유물을 임시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매점의 조리대에 걸어두던 끝이 뾰족한 항아리들도 보이고 140cm의 사람보다 두배 크게 만든 여신상도 보이는데 사람보다 크게 만들어 권위를 주었다는 설명이다. 화산 폭발의 비극을 보여주는 누워있거나 앉은 채로 발견된 사람의 캐스트가 전시되어 있는데 석고로 뜬 캐스트이기 때문에 형태가 디테일하지 않다.
개의 캐스트가 더 짠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발굴 당시 사람이나 동물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오랜 세월동안 산화되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산재 사이로 알 수 없는 공간이 있었는데 굳은 화산암 사이에 석고를 부어보니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가 나왔다. 이것을 캐스트(Cast)라 한다. 그외 테이블같은 유적들을 보면서 제우스광장을 나와 Pompei Pizzeria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기차편으로 쏘렌토로 떠난다.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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